
<생전에 악기를 제작하시던 모습>


" 명장
엄할아버지가 수제기타를 처음 만들기 시작한 것은 19세 때인 1932년에 우연히 '안드레스세고비아'의 연주를 감명 깊게 듣고 난 다음부터라고 한다. 이것은 우리 나라 최초로 클래식 기타를 제작하게 된 계기가 된다.손수 악기를 제작해 보겠다고 결심, 그 생각을 곧 실행에 옮겨 이웃에게 빌어온 기타를 요모조모 살피고 연구하기도 했다고 한다.그러나 가르쳐 줄 스승도, 참고할만한 서적도 없는 상태에서 음에 대한 감각만으로 기타를 제작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으나불가능을 가능케 했던 것은 파고드는 집념과 노력의 결과였다.
중략...
"좋은 악기란 주인이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서 결정이 되는데, 음악을 아는 사람은 악기를 사람처럼 귀하게 여긴다. 그래서 소리만으로도 좋은 악기를 구분해 낼만큼 악기를 정성으로 대한다"
이 말씀은 엄할아버지께서 생전에 자주 하시던 말씀이셨습니다.

"1942년 서울시 성동구 황학동에서 태어난 엄태흥씨는 한국 기타제작의 선구자인 고
- 2003년 7월 클래식기타 여름호 중에서 -
"본래 그는 클래식 기타 연주가의 길을 가려던 참이었다. 수차례 방송에도 출연할 정도로 연주 실력을 인정받고 있었지만 그의 꿈을 펼치기엔 집안 형편이 받쳐주지 못했다. 그래서 연주가로서의 꿈을 접고 악기 제작자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 2001년 9월 한국담배인삼공사 "심" 중에서-

한국 기타 협회및 연주가 활동
1959년 "한국기타아 연주인협회" 창립 멤버
엄태흥씨의 선생님이셨던, 고 하희형 선생님께서는 1960년대 당시, 서울시청 공보과에 근무를 하시고 계셨는데, 당시 국내 클래식 기타 연주의 대가이셨던,
당시의 하희형 선생님은 스즈끼 바이얼린 7호(당시 국내에 몇 대 없었던 고가의 일본제 수입악기로써, 최고급은 9호였습니다.)를 소장하고 연주를 즐겨 하실 정도로 바이얼린에 심취하셨던 분이시지만, 이 연주회를 계기로 바이올린을 중단하시고 클래식 기타에 심취를 하게 되었고, 이후 제자 엄태흥씨의 소개로 알게 된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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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연주가들과의 활발한 교류 활동과 호평
독일의 베를린 음대 교수 라우리 렌돌프와 다른 연주가들과도 많은 만남이 있었는데, 엄태흥씨는 그들을 만날 때마다, 자신의 악기를 보여주었고 그들의 조언을 받아 악기의 개량에 힘을 써 왔으며, 호평을 받아왔습니다.
<1990년대 베를린 음대 교후 라우리 렌돌프 방한시>

활발한 제자 양성 활동
엄태흥씨는 다른 제작가와는 달리, 기타 교육에도 열정을 쏟았는데, 덕성여대 고전기타반을 창설하였으며, 이후 10년넘게 지도활동을 하였으며, 특히 최근에는 지역의 문화센터에서 자원활동으로 기타연주 지도활동을 계속해 오고 있습니다.

외국 유명 제작가들과의 활발한 교류 활동
1980년 후반, 해외 여행 자율화를 계기로 일본, 독일, 미국의 제작가들을 자례로 방문하여 공동으로 악기를 제조하는등, 많은 교류와 연구를 하였습니다.

영국의 호세 루비오로부터 기타 제작을 사사하였으며, 벨기에를 거쳐 독일에 정착한 한국계 일본인 제작가.
1980년 후반부터 독일에서 기타 제작가 가즈오 사토와의 교류를 시작하면서, 서적으로만 접했던 독일 악기의 제작과정을 실제로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3개월간 사토씨의 초청으로, 독일에 있는 그의 집에 머물면서 악기를 공동으로 제작하였는데, 엄태흥씨의 실력으로도 콘서트 악기의 제작이 가능함을 확인였고, 국내로 돌아와 콘서트 악기의 제작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당시, 엄태흥씨의 콘서트 악기는 국내 최초, 최고의품질을 보였으며, 엄태흥씨의 콘서트 악기는 다른 국내 제작가들에게 영향을 주어, 한국 기타 제작의 수준을 한층 높이게 되었습니다.
고노기타에서 제작을 사사한 후, 프랑스의 부쉐로부터 제작을 사사함. 현재 오사카에서 악기 제작을 하고 있는 일본의 중견 제작가.
마쯔무라씨와는 상호 초빙하여 악기 제작 워크샵을 통하여 서로의 지식을 교환하는등 많은 교류를 하였습니다.


